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 폰 비스마르크 (문단 편집) === 퇴임과 사망 === 반가톨릭 문화투쟁과 반사회주의자법에도 불구하고 [[1888]]년에 [[빌헬름 1세]]가 사망한 뒤부터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3세(독일 제국)|프리드리히 3세]]가 자유주의 성향이라서 충돌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프리드리히 3세가 3개월 만에 세상을 뜨면서 자리를 이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후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사회 안정을 위해서 가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과 화해를 모색하여 충돌이 이어졌다. 루르 광산 파업에서 비스마르크가 강경 진압을 주장한 데 반해서 빌헬름 2세가 중재를 하자고 하면서 황제와의 갈등이 커지게 되었다. 이 때는 황제가 작정하고 노동자들의 권리 증진과 가톨릭계와의 화합을 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국은 비스마르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1890년 총선에서 가톨릭계 정당인 [[가톨릭 중앙당|중앙당]](Zentrumspartei)이 최대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었고,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시기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주요 정당으로 부상)이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 독일 제국의 선거법이 복잡했기 때문에 득표수와 의석수가 불일치였다.] 이 총선에서 친(親)비스마르크파의 주요 정당인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이 절반 이상의 의석을 잃는 등 친비스마르크파는 대패했고, 이로써 그 동안의 사회주의자-가톨릭 탄압 정책에 대한 명분을 잃은 비스마르크는 1890년 [[빌헬름 2세]]에 의해서 결국 제국 수상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두 인물에 관한 오늘날의 상반된 평가를 생각하면 언뜻 의외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에 의해서 권좌에서 밀려나자, 독일 내에서는 이 조치를 '''열광적으로 반겼다.''' 비스마르크가 반대파들을 기만하는 행태에 보수파부터 시작해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죄다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장원[* [[함부르크]] 근교의 프리드리히스루흐(Friedrichsruh)]으로 은퇴할 때는 [[의장대]]와 [[군악대]]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송별식을 해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프로이센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1890_Bismarcks_Ruecktritt.jpg]] 비스마르크의 총리 퇴임을 풍자한 만평. 배에서 떠나는 선장(비스마르크)의 모습을 바라보는 빌헬름 2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약 50년쯤 후, 윈스턴 처칠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직후 총선거에 패배하여 퇴임할 때도 이를 패러디한 만평이 등장했다. 후대에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빌헬름 2세가 하도 경망스럽게 구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 결정적이었고,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는 사임 이후에도 악화일로였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 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레오 폰 카프리비|후임 수상]]은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실의 원로가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못하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될 것이라고 직언했을 정도였다.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남을 가지긴 했으나 역시 전 수상의 충언을 듣는 체 마는 체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젊은 황제와의 불화로 사임한 이후에도 지방신문 사설의 주요인사로 정계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다.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는 있어도 어찌되었건 일평생 일선에서 열심히 뛴 인물임은 분명하다. 한편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년에는 거의 [[평화주의]]에 기울었고 평화주의자로 불릴만한 발언도 했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파일:bismarckdenkmal-12.jpg|width=500]] [[함부르크]]에 위치한 비스마르크 기념비 [[파일:external/www.knerger.de/bismarck4_gb.jpg]] 프리드리스루흐[* 위치는 함부르크 근교에 있으며,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S반 타고 가야한다.]에 있는 비스마르크 영묘 안에 안치된 비스마르크의 [[관(장례)|석관]]. 오른쪽은 아내의 석관이다. 말년 황제와의 갈등관계 때문에 빌헬름 2세의 신하라는 말을 듣기는 싫었는지, 석관에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이라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을 쓰라고 [[유언]]했다. 그래도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했고, 국장도 제안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사망했을 때, 임종 자리에 가족들이 비운 사이 일부 [[기자]]들이 침입해서 방금 사망한 그의 사진을 찍어 잡지에 돌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당연히 병자였던 그의 모습은 엉망진창 지저분한 모습. 결국 기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고, 이후 그의 사진은 온건한 임종 모습이 유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